포항시의사회가 발족된 것은 1953년부터로 본다.
1946년 6월에 경상북도의사회가 일제치하에서 벗어나서 창립되었으나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서도 의사회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6.25 사변으로 의사회의 역할은 중단되었고 그 후 1952년 12월 30일에 경상북도의사회가 재발족함에따라 1953년 10명 내외의 포항시내에 거주한 의사들의 모임에서 초대회장에 金東喆 회원을 추대하였다.
1954년에는 吳學駿 회원을, 1955년에는 金斗水 회원을, 1956년에는 吳學駿 회원을 재추대하였고 1953년부터 1956년까지 총무를 吳三達 회원이 맡아서 노고를 하셨고 매년 12월 중에 송년회 겸 총회를 개최하여 임원개선을 하고 경상북도의사회 회칙에 준하여 의사회를 운영해 왔다.
1961~ 1980
포항시의사회의 명칭도 몇 차례 변경되었다. 경상북도의사회 포항시분회가 되었다가 지부의 이름이 되었다가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에 의하여 의사회가 일시 해체되기도 했다. 1961년 9월에 다시 의사회가 구성되고 1967년부터 경상북도의사회 포항시분회란 이름에서 포항시의사회로 개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57년에는 병원1개, 의원 8개로 회원 수는 13명이었다. 1959년에는 병원 1개, 의원 18개, 회원 수는 22명으로 회세가 배가됨으로서 회칙의 필요성이 생김에 따라 현행 회칙의 모체인 초안을 당시 趙聖來 총무가 작성하여 1961년 정기총회에 발의하여 결의하였다. 1960년대 초부터 경상북도 의사회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의사회의 운영에 있어서 상호협력이 원만하였고 1960년대 말부터 경상북도의사회에 회비 납부도 하고 1970년대 초부터는 보수교육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포항제철소의 건립기공과 함께 포항시의 의료인도 증가하고 이로 인하여 회무와 전달사항 등이 많아짐으로 1968년 李相元 회장이 자기 병원 직원을 의사회 회무에 보조케 하였다. 점차 회무의 양도 많아지고 또한 복잡해짐에 따라 金坰燮 회장시에 포항시청 내 재건국민운동촉진회포항지부 사무실 일부에 포항시의사회의 현판을 정식으로 걸고 재건국민운동촉진회포항지부 직원으로 하여금 본회 업무를 겸직케 하였다. 얼마후 吳三達 회장이 유급직원을 두고 회무를 담당케 하였고, 李秉埰 회장때에 숙원이든 독자적인 사무실을 설치하고 전담직원을 채용하여 정상적인 회무를 체계화하게 되었다.
1981~ 1995
1980년 회원수는 58명, 1982년에는 80명으로 배가하고 1983년에는 종합병원 및 병원급이 5개, 의원이 51개, 회원은 108명으로 급증하였다. 1953년 회가 발족하면서 부터 1971년까지 임원의 임기가 1년 단위였던 것을 1972년부터 임기를 2년으로 연장하였고 1982년부터 경상북도의사회의 임기와 보조를 맞추기 위하여 임기를 3년으로 개정했다. 13년 후인 1995년 金炯祐 회장시 3년 임기는 회집행부에 물심양면의 부담과 희생이 큼을 고려하여 2년으로 임기를 개정 환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81년 대구시가 직할시로 승격함에 따라 대구시의사회가 경상북도의사회에서 분리되어 대구직할시의사회로 독립되고 이로서 경상북도의사회 중 포항시의사회가 회원 수나 회세에 있어서 경상북도의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고 5대를 연속해서 경상북도의사회장 직을 맡아서 크게 기여하였으며, 현재도 음양으로 회무에 관여하고 있다. (경상북도의사회 33대~34대 吳三達 회장, 35대 李秉埰 회장, 36대~37대 申殷植 회장, 40대 李元基 회장 역임) 1995년 1월 1일부터 지방자치제법에 따라 포항시와 영일군이 행정적으로 통합되자 포항시의사회와 영일군 의사회도 통합함으로서 회원수가 250명으로 증대되고 병의원도 134개로 회세가 더한층 약진하게 되었다.
2014
2014년 현재 李祐碩 회장이 임기 2년 임기로 재임하고 있으며, 회세는 2014년 5월 기준 종합병원 5개, 병원 11개, 요양병원 23개, 의원이 246개이며 회원수가 689명에 이르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고, 명칭은 사단법인 대한의사협회 경상북도의사회 분회로서 포항시의사회라 칭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